장애인 영역

발바닥, 기억에 기록을 더하다(4)

뻬뻬로 2016. 5. 13. 07:32

 발바닥, 기억에 기록을 더하다(4)

 발행일 : 2016.5.12(목) 3호

발행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발바닥 회원님들께>

 

지난 10년간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과 ‘탈시설운동’이 전개되어 온 과정을 회원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발바닥행동이 왜 만들어졌는지, 탈시설운동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매주 1회 메일과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추후에 이 내용을 다듬어 발바닥 10년사 자료로 묶을 예정입니다. 언제든지 회원님들이 의견을 주시면, 향후 자료제작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의견주실 곳 : footact@hanmail.net(김정하 개인메일) 담당 김정하 010-3252-9463

2회 이음여행. 시설에 살고 있는 장애인이 자립을 준비하고 용기를 갖기 위하여 진행되는 워크숍. 참가자가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발바닥에 보내는 응원의 메세지> 보내주세요~ 

       
           
       

발바닥의 박철균회원이 발바닥에게 보내는 응원메세지를 들고 웃고 있다.

☆안녕하세요 안정희입니다.

발바닥 10년의 역사를 자료로 묶는다니 너무 너무 반갑고 기분 좋은 소식입니다.
응원합니다. 홧팅 ▹ 안정희

 

☆저는 발바닥을 알고 지낸지 얼마되지않았지만 조금은 남들보다 어려운 분들께 먼저다가가 도움이되려하는 앞장서서 싸워주는 발바닥 10년이지나도 지금처럼 이자리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또 건강하시고
힘내세요. 끝까지 응원하겠습니다!

▹ 서민지

 

☆탈시설 발걸음 10년, 향후 10년은 모든 장애인의 탈시설 자립생활 달성! Viva(만세) 발바닥! ▹ 박철균 

 

[사진설명 : 발바닥의 박철균 회원님! 손수 만든 응원의 메세지를 사진과 함께 보내왔습니다]

       
           
       

<보내주세요>

 

발바닥 10년의 역사를 자료로 묶을 예정입니다. 여기에 회원님들의 한마디가 빠질 수 없겠지요? 발바닥행동에게 보내는 회원님들의 응원의 메시지를 5월 한달 동안 받습니다. 문자, 카톡, 페이스북, 텔레그램 등 각종 방법으로 보내주세요. 사진 한 장으로 마음을 전해주셔도 좋아요!

 마감 : 2016년 5월 31일

 보낼 곳 : footact@hanmail.net(김정하개인메일), 담당 김정하 010-3252-9463,

                www.facebook.com/footact0420 , www.footact.org

       
           
       
       
           
       

발바닥, 기억에 기록을 더하다(4)

– 시설, 그 자체가 인권침해

       
           
       

 

감옥의 기원과 시설의 기원, 그 맥은 닿아있었다.

 

  굳이 2002년 정부의 미신고시설 양성화 정책이 아니더라도, 사회복지시설에서의 인권침해, 운영자들의 비리와 횡령사건들은 연일 있어왔다. 531명이 죽은 형제복지원 사건은 1987년에 폭로되었지만, 26년이 흐른 2013년에야 비로서 대책위가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이 부분은 이후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1996년 에바다복지회 사건, 1998년 양지마을, 송현원, 구생원, 수심원, 뿌렌나 애육원.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15년, 2016년에도 시설내 인권침해 사건들이 변함없이 일어나고 있다. 왜 그럴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복지시설’은 이런 곳은 아닌데, 왜 같은 문제가, 같은 방식으로, 끊임없이, 계속, 안 바뀌고...... 도대체 왜 일어나는 것일까? 개인의 문제인가? 도대체 시설이 뭐 길래?......

 

  우리는 시설인권문제를 접하면 접할수록, 그 본질과 실체에 대해서 공부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우리와 뜻을 모을 수 있는 학자, 법률가, 국회의원 보좌관, 인권-장애인단체 고수들을 모아서 세미나부터 시작했다. 우리는 그동안 있어왔던 시설내 인권침해의 역사와 문제점, 사회복지시설 ‘꽃동네’와 ‘믿음의집’의 사례검토, 감옥인권 운동가들을 초청해서 강의를 듣기도 했다. 당시 꽃동네는 오웅진신부의 비리와 부동산투기, 부정선거의혹이 불거지고 있었다. 우리는 한국의 대표시설 꽃동네를 분석하는 것이 사회복지시설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갇힌 자들의 벗’이라는 이름으로 감옥 인권운동을 하는 이들과 함께 그야말로 ‘갇힌 자’들을 위해 함께 연대하자고 결의했다. 이때가 2003년이었다.

 

  공부를 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시설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이들이었지만, 실상 이들은 ‘사회적으로 추방’되었다. 빈민, 장애인, 고아, 노인, 구걸행위를 하거나 노점을 하거나, 노숙을 하거나 소위 ‘거슬리는’ 사람들을 우리 사회에서 안 보이는 ‘어떤 곳으로 추방’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은 사회정화라는 외피를 썼다. 그들의 이마에 주홍글씨를 새겼고 열등처우의 원칙을 적용했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의 시설수용은 복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설의 기원과 감옥의 기원이 그 맥이 닿아 있다는데 깊이 공감하며,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두번째 철문, 세 번째 철문을 열고 들어가서야 수용인들이 생활하는 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때 나타난 인간 군상들, 다들 허름한 츄리닝 바람에 쇠창살을 부여잡고 아우성치는 사람들, 얼굴에는 핏빛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들이 창살에 매달려 있었다.

‘제발 저를 꺼내 주세요. 납치되어 10년 넘게 이곳에 갇혀 있었어요.’


- <살아남은 아이> 중 ‘노예의 섬, 양지마을 사건’  박래군 -

삼중 철문으로 닫힌 양지마을. 거주인이 철문안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사진설명 : 1998년에 폭로된 노예의 섬 양지마을 사건. 그들은 갇힌 채 폭행, 강제노역, 성폭력, 강제불임, 강제투약 등 수없는 인권침해 속에서 살아야했다]

       
           
       
       
           
       

시설의 본질, 그 자체가 인권침해

 

  우리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확고해졌다. 우리가 목격한 형제복지원이나 양지마을 같은 곳은 정확히 노역소(workhouse) 같은 곳이었다. 노동가능 한 빈민들이 가는 곳이었다. 그리고 노동할 수 없는 몸을 가진 장애인들이 가는 곳은 구빈원(almshouse)같은 곳이었다. 자본주의의 이행에 있어 방해되는 자들을 범주화하여 이들에 대한 특화된 수용시설, 격리지구, 특수학교를 짓는 것은 ‘복지’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다. 이러한 시설의 ‘본질’, ‘태생’으로부터 우리는 시설의 존재 그 자체가 인권침해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춥고 배고픈 것보다 더 슬픈 건 내가 짐승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밥 먹고 자고 그 생활에 길들여져 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시설에서 살수 없었다.”

- 전(前) 은혜요양원 거주인 박정혁씨 글 중에서 - 

 

       
           
       

인권나부랭이들이 주장하는 허무맹랑한 ‘탈시설’

 

  그러니 우리는 시설을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분위기는 ‘시설에 반대한다’는 기치를 전면에 내세우기 어려웠다. 시설인권침해 사건의 대안은 더 나은 시설로, 혹은 인권침해 없는 좋은 시설로의 이전으로 마무리 되곤 했다. 자립과 탈시설은 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의 글과 논문 속에서만 존재했다. 자립과 탈시설을 위한 사회적 기반이 절실했다. 그때는 <장애인이동권연대>가 지하철 철로를 점거하고 버스를 점거하는 등 장애인 이동권투쟁이 불붙어 있었다. 그에 반해 자립생활운동은 일부의 자립생활센터가 만들어지고 토론회가 열리고, 시범사업이 시행되는 정도였다. 활동보조인제도 또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시범사업으로 개인이 부담하는 유료서비스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누군가 시설에서 나와 자립하겠다고 한다면? 사회적 기반이 없었다. 어떤 이는 우리에게 ‘지금은 탈시설운동을 해야 할 때가 아니라 장애인의 자립생활운동을 할 때’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사회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탈시설을 하더라도 할 거 아니냐는 현실적인 충고였다. 장애부모들은 지금도 시설이 부족한데, 시설에서 나오자는 우리의 이야기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었다. 장애가족의 현실을 모르는 인권나부랭이들의 비현실적 주장이라고 치부했다. 시설운영자들은 우리보고 ‘쟤네(시설거주인) 데리고 가서 일주일만 살아보라’고 목청을 높였다. 니들은 단 하루도 같이 못 살꺼라며 핏대를 세웠다. 정치인들과 행정가들은 당연히 '인권'이 제일 중요하다면서도 현실론을 들먹였다. 예산은 부족하고, 장애인가족들은 시설을 원하며, 일부의 파렴치범 때문에 사회복지 전체를 욕해서야 되겠냐고 했다. 선량하고 좋으신 시설장들이 더 많다는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기자들은 더 '센' 인권침해 상황은 없냐며 언제나 더 최악의 상황을 독점 취재하고 싶어 했다. 탈시설의 이야기는 어려워 했고, 기사로 다루기를 꺼려했다.


  지금 당장 탈시설 할수 있는 사회조건이 안 갖춰진 상황에서 탈시설을 주장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우리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있었다. 어설프게 탈시설을 주장해봤자 장애가족과 건전한 사회복지계 사람들을 적으로 돌릴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학자들의 발표하는 논문에서도 탈시설은 늘 장기적 대안으로만 제시되곤 했다. '지금 당장 바로 이곳에서' 탈시설을 염원하고 있던 시설거주 당사자에게는 까마득한 먼나라 이야기 밖에 되지 않았다. 

       
           
       
       
           
       

2005년 쏘쩍새마을의 신발장. 똑같은 모양의 고무털신이 신발장에 빼곡히 들어있다.

[사진 설명 : 2005년 쏘쩍새마을의 신발장. 집단생활에서 개인의 취향과 선택은 있을 수 없다. 모두에게 똑깥이 지급된 까만 고무털신이 누군것인지도 모르게 널부러져 있었다. 쏘쩍새 마을에서 만난 장애청년은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비장애동생이 수험생이기 때문에 엄마가 여기 있어야 한다고 했다며 무척 슬퍼했다. 동생이 시험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냐고 물으니, 엄마가 당분간 이곳에 있으라고 했다고 했다. 그의 인생에 ‘당분간’은 얼마만큼의 시간이었을까?]

       
           
       

 언론보도 : 오는 2016년 5월 19일은 인천 해바라기 시설에서 의문사 당한 이씨와 또다른 의문사 피해자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 과실치상으로 기소된 가해자들. 시설에서 맞아 죽은 장애인은 말이 없고, 언제나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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