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39주기 기념식 전날 밤, 광주 금남로는 비에 흠뻑 젖었습니다. 전남도청 앞 민주광장에서 진행되던 전야제 행사는 비로 인해 한 시간 만에 접어야 했습니다. 밤새 내린 비는 5월 18일 기념식 직전에야 그쳤습니다. 언제라도 다시 비를 뿌릴 것 같은 어두운 하늘, 5.18국립묘지로 가는 길에 심어진 이팝나무의 흰색 꽃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이팝나무가 있었는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흰 꽃들이 길을 덮었습니다. 나무에서 날리는 무수한 꽃잎은 마치 하얀 쌀알 같았습니다. 1980년 광주 시민군들과 나누던 흰쌀밥을 기억하라는 것일까요? 사람을 살리는 밥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총알을 날리며 공수부대들이 광란의 살인극을 벌이던 그날을 이겨낸 힘은 흰쌀밥을 뭉쳐 만든 주먹밥이었습니다. 그 주먹밥을 먹고 고립된 광주를 견뎌냈던 전사들이 누운 곳이 5.18묘역입니다.
새벽 공기를 가르던 목소리
계엄군이 쳐들어오던 5월 27일 새벽 마지막 방송을 했던 박영순 씨가 기념식에서 그날의 멘트를 다시 읇었습니다.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는 학생, 시민들을 살려 주십시오. 우리 형제, 자매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새벽까지 잠 못 들던 광주의 시민들은 방송을 듣고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날 죽을 줄 알고도 목숨으로 도청을 사수했던 윤상원과 동료들은 전날 밤에 고등학생과 여성들을 등 떠밀어 내보냈습니다. "살아서 역사의 증인이 되어 달라”라는 부탁을 들으며 울면서 도청을 나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를 대학생으로 살았던 저는 그 새벽 공기를 가르던 박영순 씨의 목소리, 그리고 마지막 도청을 지키다 죽어간 윤상원과 친구들을 잊지 못했습니다. 제 동생 래전이도 그랬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안종필의 어머님은 그때 왜 못 나가게 붙잡지 못했을까 지금도 한탄하고, 그때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안종필의 조카가 그 가족들이 겪은 5.18을 말합니다. 동생의 처참한 시신을 수습했던 아빠에게 삼촌 얘기를 차마 물어보지도 못하는 사연을 말했습니다. 진행하던 아나운서도 울고, 대통령도 울먹였습니다.
독재자 후예들의 망동 그런 자리에 황교안이 왔습니다. 기념식장으로 들어가는 황교안을 시민들이 막아섰고, 그로 인해 행사장 입구는 아수라장이었습니다. 경호원에 둘러싸여 입장한 황교안은 이전과는 달리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도 하고 팔도 흔들었습니다. 그날 대통령은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다.”라고 일갈했습니다. 5.18의 진실 규명을 방해하고, 망언을 일삼는 자유한국당 무리들에게 일격을 날린 거지요. 황교안은 거의 무표정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기념식이 끝난 뒤에도 시민들은 황교안을 에워싸고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그는 경찰이 묘역 담장을 허물고 낸 길로 뺑소니치듯 달아났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그에게서 어떤 사과를 바랐던 게 아닐 겁니다. 5.18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그의 태도에 분노했던 것이겠지요.
아직 5.18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올해 중요한 증언들이 속속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집단 발포 명령자일 가능성이 높은 전두환이 발포 직전 광주를 몰래 다녀간 정황 증언, 심지어는 수많은 시신들을 가매장했다가 화장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공수해서 바다에 버렸다는 증언도 나왔습니다. 계엄군의 성폭력에 대한 추가 증언도, 헬기 기총소사에 대한 증언도 나왔습니다. 아직 진실은 모두 드러나지 않았고, 그날의 학살자들은 여전히 범죄를 부인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고, 독재자의 후예들은 너무 당당합니다.
목숨 바쳐 이루고자 했던 세상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는 처음으로 ‘전국의 5.18-스스로 오월의 영령이 된 열사들’ 전시를 5월 한 달 동안 진행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내내 아니 1990년대까지 광주의 5.18을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광주 5.18의 해결을 촉구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바친 열사들… 1980년 광주는 외롭지 않았고, 광주의 항쟁을 잇기 위한 투쟁이 계속되었습니다. 광주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우리 재단에서도 박래전 추모관을 재단장하고 있습니다. 제 동생 박래전은 1988년 “광주는 살아 있다!”면서 분신을 했습니다. 동생은 학살자들의 처단을 요구하며 죽어갔지만, 아직 그 학살자는 응분의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는 6월 6일 다시 모란공원에 가서 동생을 봐야 하는데, 아직도 네가 내준 숙제를 못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석 모란공원 안내판에 나를 비춘다. 너도 저럴 수 있느냐? - <반성>, 맹문재
맹문재 시인이 모란공원을 다녀와서 쓴 시는 열사들의 이름과 행적을 나열하면서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목숨까지 바쳐 이루고자 했던 민주주의는 어떤 것일까요? 목숨을 걸지는 못한다고 해도, 그들이 만들고 싶었던 세상에 대한 꿈에 대해서는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박래군 (인권재단사람 소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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