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어느 날, 한 재미동포 부부가 미등록 이주민의 건강증진을 위한 사업에 기부를 하고 싶다는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이 메일을 시작으로 저와 열 여덟 번의 메일을 주고받고 나서 '지구촌인권기금'이 만들어졌습니다. 부부는 통화 한 번 하지 않은 재단에 5만 불을 기부했습니다.
기부자의 마음이 감사하면서도 재단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아는 이주민 인권활동가들에게 전화를 걸고, 만날 때마다 어떤 사업에 지원하면 좋을지 물었습니다. 화성외국인보호소를 오가며 이주민을 만나온 활동가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농업 이주여성에게 산부인과 건강검진의 기회를 제공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한편 난민인권활동가들은 아프다고 호소하는 난민을 위해 병원을 알아보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글로 적기 민망할 정도의 활동비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주민과 난민들에게 건강은 아직 보편적 권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주민 건강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면서 직장가입자가 아닌 경우 지역가입자로 가입하도록 제도를 바꿨는데, 재산소득이 평균보다 낮더라도 평균보험료(2019년 기준 113,050원)를 납부해야 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저소득 이주민일수록 보험료를 체납할 확률이 높아질 테고, 그러면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주민이 더 많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주민의 고용과 삶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제도가 이주민의 건강을 악화시키지는 않을지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이제 지구촌인권기금을 통해 이주민 인권단체 두 곳과 난민 인권단체 한 곳이 사업을 진행하게 됩니다. 대개는 이미 해왔던 일, 긴급한 의료지원비나 건강검진을 위한 비용 등으로 쓰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 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을 만나 제가 당부한 것이 있습니다. 사업계획서를 작성할 때 꼭 사업담당자 인건비와 단체 운영비를 포함해달라는 것입니다. 정부나 지자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활동가 인건비를 책정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활동가들이 강의를 하고 원고를 써도 말입니다. 사회적 지위와 자격증 유무에 따라 강사비가 책정되다보니 인권활동가의 경력은 명함도 내밀지 못합니다. 일은 사람이 하는데, 사람에게 들어가는 비용에는 매우 인색합니다. 저의 당부에 활동가들은 좋아했지만, 재단이 지원하는 인건비는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 이주민과 난민을 위해 돈을 구하고 병원을 알아보는 활동가들의 노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입니다. 이 기금이 가장 절박한 순간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그 곁을 함께 하고 있는 인권활동가들을 위해 쓰여 질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인권재단 사람은 단순히 후원금을 전달하는 역할만이 아니라, 미등록 이주민/난민의 건강실태를 살펴보는 역할도 하겠습니다. 많이 배우고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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