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를 쓰다보면 종종 ‘인권’의 ‘인’자에서 ‘ㄴ’을 빠트릴 때가 있습니다. 그럼 ‘인권’이 ‘이권’이 되지요. 받침 하나 차이로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가 만들어집니다. 인권과 이권은 한 끗 차이지만 그 사이는 엄청납니다.
‘인권’으로 말해지는 많은 사안이 실은 ‘이권’을 포장한 것에 불과한 경우를 발견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인권을 찾습니다. 인권이라고 주장하면 부정하기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억울함을 인권침해라고 주장하면 사람들이 조금 더 귀 기울여 주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신이 당당해집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인권이 아주 이기적으로 수용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억울함을 느끼는 건 인권침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남의 억울함에 대해서는 대체로 외면하거나 침묵합니다. 인권의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혐오세력이 점령한 광화문 이권을 인권으로 포장해 악용하는 사례는 넘쳐납니다. 지금 광화문 광장에 있는 우리공화당(전 대한애국당) 천막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공화당은 2017년 헌법재판소 앞 탄핵 반대 집회에서 사망한 5명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면서 5월부터 광장에 천막을 설치했습니다. 당시 안국동 사거리를 점령한 태극기 부대는 극렬한 폭력집회를 진행했습니다. 헌재가 탄핵 결정을 하자 집회 대오를 이끌던 사회자가 선동하는 가운데 경찰버스를 탈취하고 기자들을 폭행했습니다. 그로 인해 4명이 숨지게 되었고, 관련자들이 사법처리되었습니다. 이것이 팩트인데 우리공화당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주장합니다. 전형적으로 정치적 목적의 이해와 주장을 인권으로 포장한 경우입니다.
광화문 광장에는 세월호 천막이 있었고 지금은 서울시가 마련한 기억공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유가족과 시민들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5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도 안 되었으니 책임자 처벌은 최소한으로 진행되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누가 봐도 당연한 요구일 것이지만, 그곳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우리공화당 사람들에게 매일 ‘시체 팔이’ 라는 모욕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인권의 목소리로
광화문에 나가면 착잡해집니다. 우리 사회에서 집회·시위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탄압을 받았습니다. 지금처럼 광화문에서 집회도 하고, 청와대로 행진을 할 수 있었던 건 지난 촛불항쟁 덕분이었습니다.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 불의에 항거했던 그 자리가 이제는 혐오세력들이 투쟁 거점이 되어 버렸습니다. 혐오세력에게 혐오할 자유를 주려고 싸웠나 하는 자괴감이 드는 지경입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혐오세력이 벌이는 난장판을 거둘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서울시의 행정력만으로 제한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경찰력을 예전처럼 강화할 것을 주문할 수도 없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시민들의 힘, 시민들의 인권 역량이 커져서 혐오세력을 압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들이 혐오발언을 하면 엄청난 비난을 받고 무시당할 정도가 되어야겠지요. 혐오세력이 시민들 무서워서 광화문 광장에 발을 못 붙이는 날이 올까요? 광장은 이권의 목소리가 아닌 인권의 목소리로 가득 차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손잡아 줄 사람을 찾습니다
며칠 전 용산참사 생존자 한 분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용산에서 노모를 모시고 중국음식집을 하다가 재개발을 맞았습니다. 권리금도 못 받고 쫓겨나야 하는 상황이 억울해서 망루에 올랐다가 가까스로 살아났고, 그 대신 3년 반가량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중국집 사장님에서 배달부로 고용되어 생활했던 그는 우울증에 걸렸고, 가족들에게 “자책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떠났습니다. 검찰이 용산참사에 대해 제대로 수사하고 책임자들을 처벌했다면 그의 억울함은 덜 했을 겁니다. 법과 제도가 바뀌어 재개발로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없어졌다면 그는 재기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한 줌 재로 변해버린 그의 유골, 벽제승화원 옆 단지에 그의 뼛가루를 붓고 돌아온 뒤 마음이 너무 헛헛했습니다. 이런 억울함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요? 그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용기를 내어 살 수 있도록 하는 건 그들의 곁에 서주는 일입니다. 비난이나 모욕, 혐오가 아니라 그의 손을 잡는 일입니다. 우리 재단은 함께 손잡아 줄 정기후원자들을 늘리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인권의 날 하루 동안이라도 세상이 들을 수 있게 손잡아 줄 한 사람이 되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소중한 한 분을 소개해주셔도 좋겠습니다. 손 내밀어 잡아주면 그들이 용기를 내어 일어설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이 같이 하면 더 많은 이들이 힘 낼 수 있습니다. 다음 사람살이에 인권의 날을 후원하는 사람이 늘었다고 보고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마철입니다. 비 피해 없게 대비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박래군 (인권재단사람 소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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