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의원 1주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지난 20일 열린 1주기 추모문화제 자리에 앉아 영상으로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그의 출판기념회 같은 행사에 와있는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전화를 걸면 통화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러면 그는 어떤 상황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줄 것만 같았습니다. 휴대폰에 있는 그의 전화번호를 지우다가 못내 아쉬워 수첩에 옮겨 적었습니다. 그가 저세상 사람이라는 게 아직도 실감 나지가 않아서일 겁니다.
올 초에 나온 그의 책을 주말 동안 읽었습니다. 바쁜 의정 활동 중에도 진심을 담아 적은 글들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는 부지런히 공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들수록 공부할 게 많다며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인상적인 건 국어사전을 탐독했다는 겁니다. 그의 촌철살인은 국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바탕을 이루어서 가능했습니다. 그는 조선실록을 모두 읽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논평이 가능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덕목은 그가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가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그의 마음가짐은 6411번 버스 연설로 표현되었습니다. 새벽 4시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미화원들, '투명인간'으로 사는 이들의 손에 닿을 수 있는 진보 정당을 만들자는 호소가 지금도 마음을 울립니다.
“적폐청산이란 미명하에 정치 보복하는 거 아니냐?”라고 말하는데요, 청소를 할 때는 청소를 해야지 청소하는 게 먼지에 대한 보복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겠습니까. 적폐청산은 보복이 아니라 잘못된 시대를 엎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 『노회찬의 진심』 중에서 적폐청산은 흐지부지 되어가고 있습니다. 국회부터 청소해야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지금 국회는 노 의원이 한탄하던 대로 "생선가게에 다시 고양이들이 나타난" 상황입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역사의 법정에는 시효가 없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2016년 광화문에 박정희 동상을 세우자는 제안에 그는 "광화문 지하 100미터에 묻는다면 검토할 수 있다."고 응수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를 묻지 못했고, 박정희의 유령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을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박정희 신자들이 다수당이며 그 신자들이 국회에서 통과해야 할 법안들을 막고 있습니다.
노회찬 의원이 20대 국회에 발의한 61개 법안 중 아직 43개가 계류 중입니다. 이 중에 상당수는 이번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은 채 폐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안도, 정리해고 제한법안도, 국가정보원법 전부개정 법률안도 공직선거법 재정안도 그럴 운명일 것입니다. 그는 안 될 것 같은 법안들도 필요하다면 발의를 했습니다. 지금은 안 된다고 해도 언젠가는 꼭 되어야 할 것이니까요. 차별금지법안은 아쉽게도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그는 소수자들을 위한 입법 활동에도 열심이었습니다. 호주제폐지법안도, 장애인차별금지법안도 그가 대표 발의한 것들입니다.
분노는 짧지만 희망은 깁니다. 분노는 뜨겁지만 물도 끓일 수 없습니다. 희망은 종유석입니다. 흘린 땀과 눈물이 하루하루 만들어가는 돌기둥입니다. 2009년에 그가 남긴 말입니다. 우리가 흘리는 땀과 눈물로 자라나는 종유석을 생각합니다. 종유석이 자라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기에 물방울이 끝내 바위를 뚫을 것임을 믿어야 한다는 그의 우직함이 그에게서 가장 크게 배울 점입니다.
8월이 코앞입니다. 속상하고 답답한 일 많고 인권의 날은 멀기만 하지만, 희망의 종유석을 키우는 마음으로 올여름 견딜까 합니다. 인권의 종유석도 끝내는 자라서 우람한 모습을 내보이고야 말 테니까요.
박래군 (인권재단사람 소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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