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살 같다”라는 말이 있지요. 화살은 활을 쏘는 이의 의지를 실어 과녁을 향해 날아가지만 시간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빠르게만 흘러갑니다. 올해도 달력 한 장만 남겨 놓았습니다. 돌아보면 올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합니다. 언제나 바빴고 언제나 일이 많았으며 그래서 지치기도 하고 마음이 힘들었던 날들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해 동안 즐거운 일과 보람 있는 일이 많았나요? 아니면 슬픔의 골짜기에 주저앉아 울었던 때가 더 많았나요? 어두운 밤길을 밝혀주던 달빛마저 희미해지는 것 같은 절망을 느낄 때는 없었는지요.
길을 잃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 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 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이 시는 지난 21일 재단 창립 15주년 후원의 밤 행사 때 나희덕 시인이 낭송한 <산속에서>입니다. 어두운 산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보이는 한 점 불빛과 같은, 인권활동가들에게 그런 재단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따뜻했던 후원의 밤 이후
후원의 밤에 많은 분들이 와주시고 후원금도 많이 보내주셨습니다. 덕분에 목표했던 5천만 원도 훌쩍 넘겨서 내년에는 일단 현장긴급활동을 지원하는 119기금부터 늘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속가능한 인권운동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기금도 고민하게 될 것 같습니다. 모두 마음을 내어주시고 함께 해주신 후원자님 덕분입니다.
후원의 밤 일주일 후인 28일에는 <지속가능한 인권운동을 위한 활동가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3월부터 우리 재단과 '평등과 연대로! 인권운동 더하기'가 공동으로 기획해 9개월 동안 설문조사하고 전국의 인권활동가들을 만나 심층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조사 결과 10명 중 3명의 활동가는 최저임금도 못 받고 4명 중 한 명은 4대 보험조차 적용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단체의 1년 예산이 채 1천만 원이 안 되는 곳도 제법 있었고요. 이런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76%의 활동가들은 그래도 인권활동을 계속하고 싶다고 응답했습니다.
“정신적으로 힘든 활동가들이 되게 많아요.…그런데 준비 없이 이걸 시작했다가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고 활동을 그만 둔 사람들도 꽤 있어요.”
“뭔가 해결이 안 되면 이 문제가 더 커지는 것들에 대한 분노. 모르겠어요. 어디서부터 분노인지 잘 모르겠어요.…사소한 거에 화가 많이 나더라고요. 이대로 괜찮나.”
“활동가들이 쉬려고 해도 쏟아지는 일정 때문에 미안함이 있는 거죠.”
“한 번 제주도에서 발제하고 나서 혐오세력들이 와 가지고 앞에서 책상치고 삿대질하고 끝나고 저 잡으러 와고 그랬었거든요. 근데 그때 끝나고 집에 가야 되는데 제가 혼자 길을 못 걷겠더라고요.” (인권활동가 심층인터뷰 결과 중에서)
인권활동이 쉽지 않음은 잘 알고 있지만 후배 활동가들이 지쳐 있고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다는 사실이 객관적인 통계자료와 인터뷰 자료로 나오는 것을 보고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인권활동은 어려운 사람들과 힘들고 약한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것에서 시작해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도록 돕는 일일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활동가가 건강해야 하거든요.
계속 걸어가는 재단
그래서 이제부터는 가난한 활동가들이 마음 다치지 않으면서, 인권운동을 떠나지 않으면서 계속 활동할 수 있게 한 걸음 더 디뎌보려고 합니다. 5년 전 인권활동가 실태조사를 계기로 작지만 소중한 기금을 만들어서 지원했던 것처럼, 이제 다시 인권운동을 응원하고 지원하는 새로운 기금과 프로그램을 구체화해보려고 합니다. 재단이 “계속 걸어갈 수 있게” 믿고 응원해주시는 후원자님들이 있는 한 우리 재단도 지치지 않고 계속 걸어가겠습니다.
이제 겨울입니다. 인권활동가들의 더욱 든든한 벗이 되도록 이 겨울도 잘 이겨내겠습니다. 여러분도 찬바람에 몸 상하지 마시고 겨울을 잘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모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