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영역

사랑하는 발바닥 회원님들께 안녕하세요?

뻬뻬로 2017. 7. 11. 20:16

사랑하는 발바닥 회원님들께


안녕하세요? 발바닥 회원 여러분. 저는 발바닥 회원 혜영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렇게 뉴스레터를 빌려 여러분께 인사를 드리게 되어 참 기쁘고 한편으로는 조금 쑥스럽습니다.


오늘 이렇게 직접 글을 적는 것은 발바닥 회원님들께 꼭 알려드리고 싶은 소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저보다 한 살 어린, 올해로 서른이 되는 여동생이 있습니다.

이름은 혜정이라고 합니다. 중증 발달장애를 가진 동생은 무려 18년간 경기도의 한 장애인 거주시설에 살아왔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h94_g1ZyVI



저와 동생은 지난 6월 29일부터 온라인의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에서 중증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시설 밖 생존일기 <어른이 되면>’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동생을 제가 살고 있는 서울로 데려와 함께 지내며 시설이 아닌 사회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아나가고, 또 그 과정을 많은 분들께 영상으로 생생히 공유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말하자면 이 프로젝트는 서른 즈음 두 자매의 탈시설 영상일기입니다.



제가 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조금 긴 이야기를 드려볼까 합니다.


사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제가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누군가의 얼굴에서 모든 세계가 시작되기도 합니다.

제게는 제 동생의 얼굴이 그랬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동생은 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부모님보다 더 많은 시간을 동생과 함께 보냈습니다.

왜 그래야 했는지는 잘 몰랐지만, 그저 저는 동생의 그림자처럼 살았습니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 시골의 작은 아파트 단지에서 저는 한 살 어린 동생을 늘 데리고 다녔습니다.

동생은 저와 달랐고, 남들과 달랐습니다. 남들이 으레 해야 하는 일들을 하지 않았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운 일들을 하곤 했습니다.

엄마는 동생이 ‘뇌성마비’가 있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동생이 할 때마다 저는 그게 무슨 뜻인 줄도 모르고 엄마 흉내를 내며 “뇌성마비가 있어서 그래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알 만 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혀를 쯧쯧 차기도 했죠.

저는 동생이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 못하도록, 어딘가로 사라지지 못하도록 늘 동생의 손목을 꽉 붙잡고 있었습니다.


초등학생이던 저는 틈날 때마다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혜정이는 언제 정상이 돼?”

엄마는 제가 고등학생이 되면 동생이 정상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중학생이 될 무렵 엄마는 집을 나가셨고 동생은 시설로 보내졌습니다.

저는 ‘동생을 돌보아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8년이 흘렀습니다.


그 18년동안 우리 자매는 참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친구를 사귀고, 학교를 다니고, 연애도 했습니다. 일을 하고 돈도 벌었습니다. 여행도 다녔습니다.

세상에는 참 좋은 것, 좋은 곳, 좋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동생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빈 자리조차 없었죠.

동생은 마치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행복해보이는 사람들이 싫었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기쁘다가도 이내 슬퍼지곤 했습니다.


가끔 보는 동생은 만날 때마다 조금씩 ‘시설 아이’가 되어갔습니다.

시설을 집이라고, 직원들을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아무리 좋은 곳에서 아무리 훌륭한 사람들과 뜻깊은 시간을 보내도 저는 제가 싫었습니다.

저는 밝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세상의 일들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늘 달의 저편에 있었습니다. 제가 동경하는 ‘좋은 사람들의 세상’에 동생의 세상은 없었습니다.

두 개의 세상은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었고, 저는 두 세계 사이에서 헤매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동생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자신이 없었죠.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제 주위에는 동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 한 사람도.

.....................................

저는 사실 그 ‘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믿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저는 ‘이쪽 세상’에 적응한 척 하는 것에 익숙했지만 사실 동생이 빠진 세계에 진정으로 적응할 수는 없었습니다. 단지 겉돌았습니다.

그런 제가 동생과 함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자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동생을 시설에 둔 채 저는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의 시설에서 사건이 터졌습니다.

생활교사의 양심선언을 통해 그간 빈번하게 있어왔던 일상적 인권침해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입니다.

주요 피해자 가운데는 동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가장 젊다는 이유로 학부모회의 유명무실한 회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다시는 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끔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싸웠습니다.

발바닥과의 인연도 그 때 시작되었습니다. 정하, 준민의 얼굴을 보고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비공개적인 방식으로 마무리되었고, 저는 ‘시설을 파괴하려 든 철없는 여자’로 낙인찍혔습니다.

동생은 여전히 그 시설에 있어야 했습니다. 2013년의 일입니다.


동생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죄스러운 마음으로 한동한 황망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런 방황도 지겨워지더군요.

저는 가만히 다짐했습니다. 모든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한 가지를 위해 살겠다고 말입니다.

동생과 함께 사회 속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겠다는 것이 저의 새로운 목표가 되었습니다.

프로젝트 커버 이미지


그리고 저는 이제 그 시작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동생은 18년만에 시설을 벗어나 지난 6월 초부터 저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동생을 데려오며 제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동생이 ‘시설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동생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집’ ‘내 방’이라는 말을 동생이 할 때마다 저는 왠지 울고싶은 기분이 됩니다.


동생을 시설 밖으로 데려와 함께 지내야겠다고 결심한 후에도 저는 선뜻 ‘언제’를 결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날씨가 풀리지 않았던 지난 초봄, 오랜만에 집으로 데려온 동생의 앞니가 부서진 것을 보고 저는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제가 ‘조금 더 준비된’ 사람이 되려고 욕심을 부리는 그 순간에도 동생은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닳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최소한의 준비가 갖춰진다면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빨리 동생을 데려와 함께 지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올해로 저는 서른하나, 동생은 서른입니다. 함께 살아온 시간보다 그렇지 않은 시간이 더 많기에 저희는 서로를 처음부터 다시 알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두렵지만, 한편으로 두렵지 않습니다.

일곱 살의 저와 달리 지금의 저는 더 이상 동생이 언제 ‘정상’이 될지 궁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동생과 제가 바로 ‘우리들인 채로’ 이 사회에서 우리 삶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제가 이 글을 쓰는 지금 동생은 평생 처음으로 생긴 자기 방에 앉아 제일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6개월간 저는 다른 일들을 멈춰두고 동생과 살아가는 시공간을 만드는 일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영상으로 가능한 생생히 공유하는 작업을 진지하게 할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글에 링크한 텀블벅의 글을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익숙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동생과 살아가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그 일은 저 혼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동생이 이 사회에서 ‘자립’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자립이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모든 일을 척척 해내며 살아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립이란 그가 어떤 장애를 지니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한 인간이 사회와 타인의 적절한 도움을 받으며 끝없이 자기자신으로 살아나가는 과정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제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께서 그렇게 살아왔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께 힘을 보태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분들께 간절히 요청합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와 같은 도전에 직면한, 또 우리와 같은 도전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을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세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더운 날씨에 건강 유의하세요,


2017. 7. 3


생각많은 둘째언니 장혜영이 발바닥 회원님들께 드림


https://www.tumblbug.com/grown_up



*****


발바닥입니다.

오늘은 발바닥이 직접 드리는 소식이 아니라,

우리의 회원이 또다른 우리의 회원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쓴 장혜영 회원을 안 지 몇 년 되었습니다.

편지글처럼, 그녀의 동생 혜정이(이름을 밝히는 것에 대해 이 친구는 전면전으로 가자고 하며 동의했습니다)

여전히 시설, 그 안에 살고 있었지만, 그 시설의 문제를 잘 풀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마을에서 살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실은 저희 발바닥에게는 이런 분들이 참 많이 계십니다. 끄집어 내지 못한 채 늘 가슴에 기억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가끔 그 부채감으로 가는 걸까? 생각도 하지만, 실은 현실에선 그럴 틈도 없이 버텨내야 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동생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는 건 저희들에게도 아픈 무엇이었습니다. 
그녀/그녀들을 또 대면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문을 두드리고 찾아와 준 건 혜영, 혜정 자매였습니다. 

혜정 손을 잡고 시설을 나온 지 한 달 되었다는 혜영의 말 앞에서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냥..... 이 친구가 힘들지 않고 외롭지 않고

혜정이의 더 좋은 삶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게 우리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저희 주위에는 이렇게 견뎌내는 분들이 참 많으십니다. 그런데 지금껏, 탈시설 정책 만들고, 요구하고....개인적 응원만 했습니다.

그 와중에 18년간 헤어져 살았던 혜영, 혜정 자매의 '탈시설- 마을 생존'의 용기와 실천적 행동 앞에서는

뭐라도 같이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바로 직면한 우리 바람이기도 하니까요.

무엇을 같이 할 수 있는지, 함께 찾고 있습니다.

회원님들의 여러 제안도 좋겠어요^^

뭐라도....우리 같이 하면...

혜영, 혜정의 더 좋은 각자의 삶을 위해서.



발바닥행동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