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한국 운동

성서한국운동, 이렇게 간다(복상 050907)

뻬뻬로 2007. 3. 18. 15:01

성서한국운동, 이렇게 간다


박종운(성서한국 집행위원장)



2005 성서한국대회가 끝나자마자 CBS 저널에서 최의팔 목사님과의 토론 섭외가 들어왔을 때, 저는 한동안 망설였습니다. 왜냐하면, 저 개인이라면 어떤 분하고도 토론을 할 수 있겠지만, 참여단체들의 연합운동체인 성서한국의 특성상, 조직위원 중 한 명에 불과한 제가 성서한국의 입장을 대변하기는 어렵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2005 성서한국대회 조직위원회가 집행위원회로 전환되고,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선임된 지금, 저는 더더욱 개인의 입장보다는 성서한국 집행위원장의 입장 표명을 요청받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성서한국수련회에 강사로 참여했던 기독단체들의 30-40대 실무자 그룹이 모여서, 개별단체, 개별 운동의 한계를 자각하고 통전적인 연합운동을 꿈꾸면서 성서한국의 방향을 넓은 의미의 사회선교로 정한 것이 2004년 초, 복음주의권 최초로 사회선교대회를 공식 표방하면서 2005 성서한국대회 조직위원회를 구성하고, 자문위원회와 지도위원회, 공동대표단, 공동대회장 등 구체적인 대회 조직을 완비한 것이 2005년 3월입니다. 어쩌면 이제 시작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성서한국은 그동안 복음주의권을 중심으로 전문직역, 구제 및 봉사, 시민운동에서 자리 잡고 있던 단체들의 연합체로서, 참여단체에서 파송된 대표와 개인 자격의 위원들이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모든 현안을 수평적 리더십이 강조되는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결정하기 때문에, 집행위원회에서 결정된 사항이 아니면 그것은 개인 의견에 지나지 않고, 최 목사님과 토론한 당사자로서 최 목사님의 의문에 답변할 책무를 지닌 제가 이글을 쓰는 것 또한 그러합니다. 30-40대가 주류인 집행위원들 간에는 정치사회적, 신앙적 경험이나 공통점이 적지 않기 때문에, 참여단체와 집행위원들이 대체로 동의하고 함께 가고자 하는 큰 틀과 방향은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까지 완성된 것은 아니고,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는 수평적 리더십 아래 치열한 토론을 통해 해결책을 찾으면서 조금씩 구체적으로 만들어져가는 형태입니다. 만일 제가 개인 자격으로 만났다면 최 목사님과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나, 성서한국 집행위원장의 지위에서는 가능하면 집행위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도의 답변을 하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성서한국운동의 한계에 대하여


최 목사님은 성서한국운동을 하는 이들의 현실 인식과 관심의 방향이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지적이 교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교계’ 일각이 ‘진보진영’을 말한다면 그러한 지적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간이 하는 모든 운동은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무한계 운동이란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운동이 아니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 진보진영의 입장에서 성서한국운동을 바라본다면, 자신들과의 차이를 한계로 인식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성서한국운동이 진보진영과 활동의 내용을 질적으로 함께 하지 않는 한, 계속하여 지적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만, 지적되는 한계에 대해서는 별도로 살펴보겠습니다. 

  

‘성서한국’이라는 타이틀에 대하여


최의팔 목사님은 성서한국의 사명선언서에 대해 동감하면서도, ‘성서한국’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것에 대해 “궁극적으로 광신적이고 파쇼적이며 극우파적인 색채를 띠지 않을까?” 적지 않게 우려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근본주의적,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적인 교회 지도자들의 일부 행태를 돌이켜보면, 그러한 우려에 대해서는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성서한국운동을 이끌어 가는 참여단체 및 구성원의 성향과 경력, 수평적 리더십이라는 의사결정원칙 등을 보면, 성서한국운동은 그렇게 되기 어려운 구조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 사회운동을 하는 단체를 조직하면서 기독교 색채를 띠는 이름을 사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은 단체가 내·외부의 시선으로부터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한국운동은 기독교인이 기독교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기독교적 색채를 띠고 하는 운동이고, 활동의 대부분은 1차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색채를 띠는 이름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고, ‘성서한국’이란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적합하므로 현재까지는 이름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또한, 최 목사님의 우려는 이름을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최 목사님이 인용한 E.J.디온의 한마디는 ‘선 - 예수 믿는 우리들 / 악 - 그렇지 않은 타인들’이라는 단순한, 그래서 지극히 위험한 사고를 가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정치 세력화되어 권력을 휘두르는 미국 사회에 대해 매우 유효한 지적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이 그러한 사고하에 집단행동에 나서는 순간 그들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 자기 의(義)에 도취된 자들일 뿐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닙니다.


성서 해석의 문제에 대하여

 

“성서해석 문제는 운동의 지향점 문제”라는 최의팔 목사님의 말씀에 대해 기독교 사회운동을 표방하는 사람으로서 정말 공감이 가고, 사실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누가, 왜, 어떻게 성서를 해석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고, 동일한 사안에 대해 전혀 다른 입장을 표명하는 기독교인들도 저마다 성서를 근거로 내놓는 것이 사실입니다. 기독인들에게 있어서는 성서가 곧 진리요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표현된 ‘성서’를 삶의 준거로 삼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위와 같은 해석의 다양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기독인의 사회운동, 사회참여, 사회적 책임의 1차적인 근거를 성서 외에 다른 곳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성서한국 사명선언서는 이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각 영역에서 복음의 빛으로 제반 문제점들을 조명하며 적극적으로 대안을 마련해 나가는 책임 있는 주체로서 설 수 있도록 돕는다.”고 표현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과거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사회운동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인 색채를 풍기지 않는 단체에 들어가, 자신의 신앙, 신념에 적합한 운동을 조용히 수행해 나가는 것이 편하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우리나라의 교회, 교파, 교리의 현실상, ‘무오류, 문자적 해석’이니, ‘신앙고백, 비판적 관점’이니 ‘성경적  근거’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머리가 아파오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피해가고 싶으며, 거창하게 ‘성서해석’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계시 받고 깨달은 바를 실천적인 삶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신앙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사상검증, 신앙검증이라도 하듯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성서한국운동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통전적인 연합운동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이 문제 또한 반드시 드러나게 되겠지만, 다양한 단체 및 교회가 참여하고 있는 연합체의 특성상 지금 이 자리에서 결론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이후에 성서한국에서도 정치·사회적 발언을 하게 될 기회가 올 것이고, 그때 성서를 근거로 제시할 것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밝혀지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입니다. 


80년대에 저는 ‘당파성’이라는 용어를 매우 좋아했고,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편애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보다 많이 사용합니다. 일반 기독인들과의 대화에서 운동권적인 용어가 갖는 이질감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지만, 당파성의 이름으로 너무나 쉽게 상대방을 단정하고 분리하고 투쟁했던 20년 전 가슴 아픈 과거 때문입니다.

 

문득 어떤 목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쪽방 사역을 하는 청년이 아이들과 함께 재미있게 놀면서 찍은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그중 표정이 아직도 환해지지 못한 아이를 가리키면서 “그래, 넌 지금부터 사랑 2배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저는 그런 것이 당파성이요, 편애요, 하나님의 공의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실천적으로 답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이 2배가 될 수 있는 동력은 어디서 나올 수 있는지, 자기희생과 헌신, 동적이고 발전적인 자원 창출에 대해 함께 논의해 보고 싶습니다. 


과거 청산에 대하여


CBS 저널 녹화할 당시 최의팔 목사님은 과거에 대한 복음주의권의 반성이나 회개에 대해 말씀하셨고, 저는 그것은 성서한국대회 조직위원들이 할 일은 아니고, 그렇게 하기도 곤란하다는 취지로 답변하였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성서한국이 복음주의를 대표할 수도 없고, 복음주의권에서 성서한국에 대표성을 부여한 적도 없으며, 최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은 과거를 가진 분들이 최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그러한 반성과 회개를 할 지 여부도 불확실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서한국이 복음주의권에서 태동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반성과 회개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말하기는 쉬울지 몰라도, 내용이 없게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서한국을 이끌어가는 집행위원들은 (특히, 80년대 상황에서) 진보진영에 속한 분들과 공유할만한 경험들이 오히려 더 많고,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회개와 반성이 부족하다고 할 것이지만, 진보진영 앞에서는 반성과 회개가 촉구되는 부담스런 과거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습니다.

 

연대의 가능성에 대하여

 

최 목사님은 복음주의 진영과 진보진영이 함께 사회 개혁을 위해 나설 수는 없을까 물으셨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서로의 다름과 필요를 인정한다면,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 충분히 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동일한 사고와 실천을 하고 있다면 연대 정도가 아니라 연합, 연맹, 아니 하나의 단체로 묶여도 문제가 없겠지만, 연대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사고를 가진 개인 혹은 단체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연대의 경험이 있습니다. 최근의 일만 돌이켜보면, ① 2003-4년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 당시 현재 성서한국운동에 참여하는 단체 및 개인을 중심으로 한 ‘이라크 평화를 위한 기독인연대’와 진보진영의 ‘반전평화기독연대’가 연대하여 기도회, 문화행사 등을 함께 한 적이 있고, ② 올 해에는 성서한국 참여단체인 ‘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성토모)의 제안으로 형성되어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세금 정책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토지정의시민연대에 진보진영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③ 성서한국 참여단체인 교회개혁실천연대는 진보진영과 함께 “교회개혁단체협의회”를 구성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권 기독단체 실무자와 활동가들이 매월 모임을 갖고 있는데, 우선 여기에 진보진영 실무자 및 활동가들도 참여해서 함께 음식을 나누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요? 성서한국 참여단체들이 주관하는 각종 아카데미와 포럼, 수련회에 진보진영의 청년 대학생들이 참여하는 것은 어떨까요? 진보진영에서도 좋은 프로그램, 만남의 장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머지않은 장래에 “복음주의(개혁주의)와 진보진영(에큐메니컬 진영)의 연대는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가능한가, 로드맵을 만들 수 있는가” 등을 논의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이해하고 부분적으로는 닮아가고 어떤 점은 함께 실천하게 될 것으로 낙관합니다. 경험적으로 볼 때 이론이나 신학적인 일치가 먼저 이루어지기보다는 교류와 협력, 부분적인 공동실천이 선행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같은 점과 다른 점이 구별될 것이며, 닮아갈 수 있는 것과 고유의 내용이 정리될 것입니다.


성서한국에 대해 소망을 갖고 지켜봐 주시길


사실 성서한국운동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주의권 청년 대학생들에게 사회선교의 지평을 이제 막 펼쳐내려는 순간입니다. 정체가 뭐냐, 어떠한 색깔을 지녔느냐, 어떠한 당파성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복음주의권에서 태동된 기독교 사회운동을 위한 연합체로서, 균형 잡힌 신앙관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운동을 이끌어가는 사람들 간에 생각하는 방향과 범위가 상당 부분 유사하지만, 구체적인 부분은 2005 성서한국대회를 시작으로 조금씩 손발을 맞추어가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입니다. 2005 성서한국대회 후속 작업, 각종 아카데미와 포럼을 거쳐 구체적인 사안들 속에서 치열한 논의를 통해 하나씩 실체를 드러낼 것입니다.


최의팔 목사님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최 목사님의 우려에 대해서는 백 가지 말로 현혹하기보다는 한 가지 실천으로 대답하겠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사랑스런 심정으로 성서한국운동을 지켜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2005. 9. 7.